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
디모데전서 2:8-15
요 절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바울은 지금까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를 권했습니다. 본 절부터는 공중 예배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지켜야 할 규율을 다루고 있습니다. '원하노라' 강한 소원이며 명령의 의미를 내포한다. 바울은 먼저 남자들이 교회 내에서 서로 화목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엄격히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착한 행실로 단장하고 조용히 배우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무엇으로 단장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의 원칙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I.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8)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각처에서 라고 했는데 각처는 어디를 말할까요? 에베소에 있는 여러 교회들, 가정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을 가리킵니다. 각 가정에서 모이는 권속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남자들에게 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자들이 교회 내에서 서로 화목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엄격히 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남자들에게 분노와 다툼을 버리고 기도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된 성도들로 인해 성도들 사이에 많은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저마다 분노와 미움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불신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분노와 다툼, 불신의 마음이 있으면 기도가 막힙니다. 분노는 난폭한 열정을 가리킵니다. 다툼은 의심하고 논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을 품으면 난폭해집니다. 또 서로 의심하고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상대방을 배반합니다. 부부간에도 분을 품으면 어떻게 됩니까? 상대방의 치명적인 약점을 들추며 악담을 퍼붓습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습니까? 더 악독한 말로 상처를 줍니다. 이렇게 분노하고 다투면 기도가 될까요?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또 성도들 간에도 분노하고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함께 주의 일을 하다보면 서로 의견이 안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서로 의견을 말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무슨 대변인이나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 주장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래서는 안 되느냐 하면 기도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분노와 다툼이 없이 해야 합니다.
잠언 기자는 말했습니다. "분노를 쉽게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시비를 그치게 한다."(잠 15:18) 분을 쉽게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자주 싸우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20절에 "분을 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고, 에베소서 4:26-27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분을 내는 시간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시간입니다. 분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마귀가 좋아합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사람을 평가하는 3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돈 주머니와 술잔과 분노입니다. 사람에게 돈을 주어 쓰도록 해보고, 술을 마시게 하여 그 사람의 인격을 저 울질 해보고, 분을 내도록 유도해 봅니다. 그렇게 하여 품위를 잃지 않고 끝까지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면 믿어도 되고 큰 일을 맡겨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거룩한 손을 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서서 두 팔을 벌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드는 손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으로 온갖 악행을 자행하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손에는 형제를 해치는 피가 가득하면서 하나님 앞에 와서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눈을 가리고, 듣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5: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 하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중에 형제에게 상처를 주거나 원망 들을 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가 기도를 할려고 하면 성령께서 그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또 예배를 드리려고 앉아있으면 그 죄가 생각이 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려면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함을 촉구하시는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뒤따르지 않는 기도는 허공에 외치는 메아리와 같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너희가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명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공예배에서 기도를 맡은 분들은 모든 교인을 대표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맡은 분들은 한 주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기도를 준비해야 합니다. 내 손이 거룩한 손이 되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 청결한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기도해도 하나님께 외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죄를 품고 드리는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마음에 숨은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영국의 고아들의 아버지 죠지 뮬러는 일생 동안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5가지 비결을 말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속에 죄를 품고 있으면 마귀가 끊임없이 참소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사단의 참소를 물리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기도할 때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목욕을 하고, 예수님의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참소를 받기 때문에 기도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II. 오직 선행으로 단장하라(9-10)
당시 에베소는 아시아의 수도요, 항구 도시로서 로마의 최첨단 의상들이 유행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미성숙한 귀부인들이 최첨단 하이패션 차림으로 교회에 와서 남자들 앞에서 아기죽거렸습니다. 머리를 땋아 올려 온갖 값비싼 보석으로 꾸미고 다니며 영적인 분위기를 흐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들의 교회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권면하였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과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단정하다는 말은 코스모스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코스모스가 무슨 뜻인가요? 우주, 질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단정한 이라는 말은 잘 정돈된이라는 뜻입니다. 옷차림에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라고 했습니다. 소박함과 정절은 옷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단장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소박함이란 예절이 바르고 고상한 태도를 말합니다. 정절은 물론 남편에 대한 정절도 포함됩니다. 한 남편의 아내로서 충실한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거기에서 단정한 옷차림이 나오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바른 예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절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정절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신랑에 대한 정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절에서 단정한 옷차림이 나오고, 바른 예절이 나옵니다. 이런 소박하고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한 사람을 대하고 나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또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언행이 무례한 사람을 만나고 나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당시 여자들은 머리를 땋았습니다. 또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자기를 단장했습니다. 외모를 꾸미는데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습니다. 보물로 치장을 하고, 값진 옷, 명품을 입기를 좋아했습니다. 당시 교회만큼 남녀 차별이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유대 사회도 그렇게 소아시아지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었습니다. 남자의 소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한 미국에서 여자들이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되었을 것 같아요? 찾아보니까 이제 90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2000년 전이면 어떠하겠습니까? 남편의 지배아래 있던 여성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고 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면 남녀가 평등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여자들이 살판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란하게 옷을 입고 오기도 하고, 온갖 값진 보석으로 치장하기도 하고, 교회가 여성들이 자기를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진주나 값진 옷으로 자기를 단장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단장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오직 선행으로 자기를 단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마땅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오직 착한 행실로 자기를 단장하는 것이 교회에서 여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잠언 기자는 착한 행실이 따르지 않은 여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다”(잠 11:22) 돼지 코에다가 금고리를 달면 어떻겠습니까? 요즘 아무리 금값이 비싸도 우스겟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착한 행실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자신을 아름답게 꾸며도 하나님이 보실 때 돼지코에 금고리 달아놓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단정한 옷차림, 소박함과 정절로써 몸과 마음을 단장하고, 착한 행실로 자신을 단장하는 여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바울은 오직 선행으로 자기를 단장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착한 행실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옷입니다. 마음 씀씀이가 착하고, 늘 단정하고, 예절바르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 착한 일을 많이 하는 분들은 어딜가든지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말은 번지르하게 하는데 그 행실이 나쁘면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정이 얼마 가지 않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의 거짓되고, 이기적이고, 무례하고, 폭력적인 모습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겉만 꾸미고 아름답게 하는 사람은 금방 싫증이 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돋보이고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행실이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평생을 함께 있고 싶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여성들을 통해서 당신의 복음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한마음교회 성도들은 오직 착한 행실로 자신을 단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성숙한 여인들의 사람과 섬김을 받으면서 남자들이 감동을 받고, 영적인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 같습니다.
III.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11-15)
11-12절을 보십시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 말씀은 영적 질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만들어 세우신 기관이 두 개가 있는데 그 하나는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두 기관에 영적 질서를 세워주셨습니다. 가정에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시고, 순종하도록 명하셨습니다(엡 5:23).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를 배나 존경하고 순종하도록 명하셨습니다(딤전 5:17; 히 13:17). 그래야 가정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교회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중의 하나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설교를 말하고,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주도권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들이 가르치고 남자들을 주관하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요즘은 여자 목사들도 많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남성들이 점차 여성화되어 가고, 여성들이 섬세하기 때문에 목양(牧羊)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여성들을 존중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을 남성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법적,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킨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도서에 보면 여자가 선한 것을 가르치는 것을 좋게 여겼습니다(딛 2:3). 그러나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자가 너무 나서고 말을 많이 하거나 남자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겸손히 배우고, 착한 행실로 본을 보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여성들에게 남자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는 근거라 무엇입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그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어 주셨습니다. 이는 남자가 더 우월하고 여자가 열등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창조의 순서일 뿐입니다(창 2:18-25). 그러나 이 순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이는 남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여자보다 더 본질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자를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고전 11:3). 이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은 아담이 마귀에게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여자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남편을 죄에 빠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뱀은 남자인 아담을 유혹하지 않고 먼저 여자인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이는 뱀이 볼 때도 하와가 유혹에 약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 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마귀의 유혹에 넘어 간 하와에게 남편의 다스림을 받도록 권한을 제한하셨습니다. 남편의 권위 아래 머물러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서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여성의 특성을 창조주 하나님 편에서 소화하고 거기에 맞는 삶을 살도록 권한 것입니다. 여성들은 섬세하기 때문에 그만큼 유혹에 약할 수 있습니다. 모든 여성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의존적이기 때문에 남의 말을 잘 듣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약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게 되면 아담의 가정처럼 하나님 앞에 범죄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지 말고,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조용히 순종함으로 배우는 것이 본인에게나 교회 질서를 지키는 면에서 덕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은 여자들은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즉 '정절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뛰어날 수 있는 품성들입니다. 여기에 거하라는 말은 계속 그런 성품들 가운데 머물러 있으라는 뜻입니다. 정절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사랑을 베풀고, 거룩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해산의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산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는 말씀은 여전이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예민한 문제로까지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당시 남성 우위 문화에서 주어진 명령이냐,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주신 명령이냐,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나 문화적인 요소가 전혀 없지 않겠지마는 바울은 창세기 말씀에 근거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질서라는 측면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이 맞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장로교 교단에서는 여성안수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신학자들이 더욱 더 많은 논쟁을 통해서 해결을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 있는 대로, 또 본문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숙함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는 삶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또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권면은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생겨난 생각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근거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여자들이 없이 교회가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3) 자매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먹성이 좋은 열두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섬겼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도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림으로 장사할 날을 준비하였습니다. 여성들의 착한 행실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큰 힘을 얻으셨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루디아 자매님의 기도와 재정적인 지원으로 바울은 선교 역사를 힘 있게 섬길 수 있었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루디아, 브리스길라, 유오디아, 순두게와 같은 매우 강력한 여성 일꾼들이 있었습니다(행 16:14,15; 행 18:2; 빌 4:2). 실제로 브리스길라는 아볼로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성경을 가르쳤습니다(행 18:26). 그러나 남자를 주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오직 선행으로 단장하고, 조용히 순종하며 동역하는 믿음의 여성들을 통해서 어두운 그 시대를 밝히고, 생명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 대구 CMI와 한마음교회를 돌아볼 때도 착한 행실로 자기를 단장하며 조용히 배우며 성장하는 성숙한 여성들을 통해서 많은 선교사들을 길러내어 파송했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착한 행실로 단장한 많은 믿음의 어머니들이 탄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입니다. 남자는 분노와 다툼을 버리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여자는 오직 착한 행실로 자기를 단장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에게 마땅한 일입니다. 또 여자는 남자를 주관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해야 하니다. 우리가 각자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위치에서, 창조의 질서를 지키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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